인파 위험성 사전에 예상한 경찰 내부 보고서 삭제

법원, 박성민 전 서울청 정보부장 징역 1년 6개월

용산서 전 정보과장 집유, 정보과 경위 징역 4개월

"경찰 책임 축소·은폐, 실체적 진실 발견 어렵게 해"

유가협 "공직자 형사책임 첫 인정, 의미 작지 않아"

"용산서장, 서울청장 등에게도 엄중한 형 선고해야"

이태원 참사 관련 경찰 내부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성민(57) 전 서울경찰청 공공안녕정보외사부장이 14일 오후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공판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2024.2.14. 연합뉴스
이태원 참사 관련 경찰 내부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성민(57) 전 서울경찰청 공공안녕정보외사부장이 14일 오후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공판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2024.2.14. 연합뉴스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 직후 인파가 몰릴 위험성 등을 사전에 예상한 경찰 내부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했던 경찰 간부가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태원 참사 책임으로 재판에 넘겨진 20여 명의 공직자 가운데 법원이 처음 철퇴를 내린 사례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배성중)는 14일 증거인멸교사와 공용전자기록 등 손상 교사 혐의로 기소된 박성민 전 서울경찰청 공공안녕정보외사부장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김진호 전 용산경찰서 정보과장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들의 지시를 받고 실제 보고서를 삭제한 혐의로 함께 재판받은 곽모 전 용산서 정보과 경위에 대해선 징역 4개월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기존 자료를 보존하거나 제출하는 등 (이태원 참사) 수사에 성실히 협조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나, 정반대로 사고 이전의 정보 보고서 파일 삭제를 지시 또는 이행하거나 전자정보를 임의 파기함과 동시에 형사사건 징계 사건의 증거를 인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이 같은 범행은 그 자체로도 공무를 망친다는 점에서 죄질이 좋지 않고 전국민적인 기대를 저버린 채 경찰의 책임을 축소·은폐함으로써 실체적 진실 발견을 어렵게 해 책임에 상응하는 엄정한 처벌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히 박성민 전 부장에 대해 "공공 안녕과 여론 대응을 위한 정보활동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던 사람이자 고위 간부 중 한 사람"이라며 "사고 발생 직후부터 사고의 원인이나 책임을 파악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책임 소재가 경찰 조직 내로 향할 것을 크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심지어 비극적이고 불행한 사고의 발생을 기회로 삼아 경찰 조직의 업무 범위를 사고 이전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구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모습까지 보였다"고 질책했다.

이어 "보안 유지라는 명목 하에 내부 보고서를 은폐하는 지시를 함으로써 경찰의 투명한 정보 활동을 방해하고 경찰 조직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저해하는 결과마저 초래한 바 가장 엄중한 처벌을 피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다만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 발견 행위를 적극 방해하고 무력화하려는 의도에서 범행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면서 "오랫동안 경찰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여러 차례 표창을 수여받는 등 성실히 근무해왔다"고 덧붙였다.

 

이태원 참사 관련 경찰 내부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진호(54) 전 용산경찰서 정보과장이 14일 오후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공판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2024.2.14. 연합뉴스
이태원 참사 관련 경찰 내부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진호(54) 전 용산경찰서 정보과장이 14일 오후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공판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2024.2.14. 연합뉴스

김진호 전 과장에 대해 재판부는 "용산 정보를 총괄하고 수사와 감찰에 협조할 책임이 있지만, 여러 차례 박 전 부장의 지시를 받고 그 지시가 위법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상급자 지시에 따른다는 명목하에 부하 직원들에게 이 사건 보고서 파일을 삭제하도록 반복해 강하게 지시했다"며 "직원들로부터 삭제 행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음에도 계속해 위법한 행위를 하도록 강제해 자신의 지시를 받아 행동했을 뿐인 부하 직원 곽 경위마저 함께 기소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곽 경위에 대해서는 "윗선의 지시를 어기기 어려운 점, 보고서 내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성자의 동의가 있는 줄로 알고 지시에 따라 삭제했다는 점에서 범행 가담 정도가 경미하다"고 판단했다.

이미 상급기관에 보고가 돼 정상적으로 보고서를 삭제한 것이라는 피고인들의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2022년 이태원 핼러윈 데이와 관련한 공공안녕에 대한 위험 예방과 대응을 목적으로 작성된 이 사건 점검 보고서들은 핼러윈 데이가 무사히 종료되기 전까지는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고 직후 박 전 부장은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김 전 과장도 침묵만 지키다 취재진이 '유족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하자 "죄송하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서둘러 법원을 빠져나갔다.

 

윤희근 경찰청장이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1차 청문회'에서 선서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윤 청장,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김광호 서울경찰청장. 2023.1.4
윤희근 경찰청장이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1차 청문회'에서 선서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윤 청장,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김광호 서울경찰청장. 2023.1.4

앞서 검찰은 박성민 전 부장과 김진호 전 과장에게 각각 징역 3년을, 곽모 경위에게는 징역 1년을 구형했다. 박 전 부장과 김 전 과장은 이태원 참사 전 용산경찰서 정보관이 작성한 '할로윈 축제 공공안녕 위험 분석' 보고서와 핼러윈 축제 관련 특정정보요구(SRI) 보고서 3건 등 총 4건의 정보 보고서를 참사가 일어난 뒤 삭제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기소됐다.

박 전 부장과 김 전 과장은 2022년 12월 구속됐다가 지난해 5월 보석 석방돼 불구속 재판을 받아왔다. 재판부는 이날 박 전 부장에 대한 보석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박 전 부장은 부서 내 경찰관들에게 핼러윈 데이 대비 관련 자료를 삭제하도록 지시해 실제 업무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 1개를 삭제하게 한 혐의(증거인멸교사죄 등)로 지난달 추가 기소되기도 했다.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 대응과 관련해 경찰 간부를 비롯한 주요 피고인 가운데 1심 판결이 나온 것은 박 전 부장 등이 처음이다.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의 경우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지난달 기소됐다. 참사 당일 서울청 상황관리관 당직 근무를 한 류미진 전 서울청 인사교육과장 등도 함께 기소됐다. 이 밖에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등 용산서 관련자 5명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 용산구청 관련자 4명 ▲최재원 용산구보건소장 등의 1심 재판이 서부지법에서 진행 중이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국민의힘이 이날 의결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 행사 건의를 규탄하며 삭발한 뒤 가족의 품에 안겨있다. 2024.1.18. 연합뉴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국민의힘이 이날 의결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 행사 건의를 규탄하며 삭발한 뒤 가족의 품에 안겨있다. 2024.1.18. 연합뉴스

이날 판결 직후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입장문을 내고 "이번 법원의 판결은 이태원 참사 발생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물은 결과는 아니다"라며 "하지만 이태원 참사 직전 경찰이 인파 밀집을 예측하고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참사가 일어난 이후에는 도리어 참사와 관련된 정보를 은폐하고 축소하기 급급했던 것과 관련해 공직자의 형사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례로 그 의미가 작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어 "용산경찰서에서 작성된 정보 보고서 여러 건에는 2022년 핼러윈 데이를 즈음해 이태원에 많은 인파가 밀집할 것으로 예상하며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을 기재하고 있었다"면서 "인파 밀집을 예측하고도 경찰이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않아 발생한 참사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이 정보 보고서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피고인 박성민, 김진호는 참사의 책임 소재가 경찰 내부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정보 보고서 삭제를 지시했다"고 짚었다.

이들은 "159명의 생명이 스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참사 발생 1년 3개월이 지나도록 제대로 책임을 진 공직자가 단 한 명도 없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겪은 유족들은 공직자들의 후안무치한 태도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며 "뒤늦게나마 재판부가 정보 보고서 삭제를 지시한 경찰의 형사책임을 인정하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피고인 박성민에게 실형을 선고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했다. 그러면서 "박희영 용산구청장,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등 다른 고위공무원들에 대한 형사재판이 진행되고 있으며,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에 대한 형사재판도 곧 시작된다. 사법부가 이들에 대해 엄중한 형을 선고함으로써 유족의 아픔을 달래고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끝으로 "재판부는 피고인들 공통의 양형 사유로 '국민의 안전을 중시하며, 향후 비슷한 사고 방지를 위해서라도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사회적 요청을 겸허히 수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해 유가족과 국민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거부권을 행사했다"면서 "참사의 진상 규명은 일부 공직자의 형사처벌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국회는 재판부의 판결을 잘 새겨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재의결하고, 정부는 겸허한 태도로 이태원 참사의 진상 규명에 협조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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