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강의 7]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1. 생각의 자기동일성과 있음의 자기동일성에 대하여

지난 시간에 우리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철학자들이 어떻게 대답하려 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없음의 불가능성을 통해 아무것도 없다는 사태가 그 자체로서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것이므로 ‘아무것도 없지 않고’라는 전제에 입각하고 있는 ‘왜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이 애당초 불가능한 것임을 보였습니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없음을 부정할 수 없는 현상으로서 인정했지만, 그는 없음이 있음 그 자체의 반대가 아니라, 또 다른 있음이라고 보았습니다. 있음과 없음의 대립은 있음과 있지 않음의 대립이 아니라 사실은 있음과 또 다른 있음의 대립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없음이란 아님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서도 절대적 없음이란 ‘아님’ 또는 ‘다른 있음’으로 해소되어 그 자체로서는 부정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무를 부정함으로써 존재 그 자체를 절대화했다면,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은 신을 절대화함으로써 존재를 절대화했습니다.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은 그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지만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신은? 신은 왜 없지 않고 존재하는 것인가요? 이렇게 묻는다면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증명 방식은 달랐지만, 결론적으로는 똑같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왜 신이 없지 않고 있느냐는 반문은 불가능한 물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대답하든, 이런 시도들은 모두, 결과적으로 존재를 절대화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존재 그 자체를 절대화시켰고, 그리스도교 철학은 신의 존재를 절대화함으로써, 신을 통해 존재를 절대화한 것입니다. 두 가지 길 가운데 어떤 길이 더 설득력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방법이 더 낫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존재를 직접 절대화한 데 반해, 중세 철학자들은 신이라는 존재자를 통해 존재의 절대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려 한 것이므로, 신의 존재가 부정되면 존재의 절대성도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칸트가 보여주었듯이,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존재를 절대화함으로써 허무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면, 우리가 걸을 수 있는 길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이 걸었던 길밖에는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또 우리가 끝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일까요?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절대화히는지 그 내적인 원리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단, 존재가 절대적이라는 것은, 존재의 반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의 부정은 아무것도 없다가 되겠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존재는 부정될 수 없으니, 절대적으로 긍정됩니다. 이는 존재의 외부가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존재에 대립하는 타자는 존재 내부에도 외부에도 없고, 위에도 아래에도 없습니다. 존재는 전면적입니다. 이런 존재의 절대성 속에서 무는 부정되거나, 아니면 존재에 종속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이 됩니다. 이렇게 존재가 절대화되고, 반대로 무가 절대적으로 부정되면, 허무의 위협으로부터 존재를 지킬 수는 있을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있음만이 있고 없음은 없으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없음은 잊어버리고 있음에만 주목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형이상학은 이제 오직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존재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우리가 무를 잊어버리고 존재에만 몰입해도 되는 것일까요? 있음만이 있고 없음은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있다는 있다’이고, ‘없다는 없다’이다는 말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처럼 지당한 말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일률의 표현이지요. 동일률은 생각의 근본 법칙입니다. 이 법칙을 어기면 생각이 자기 자신과 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생각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A=A라는 생각의 형식을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A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든,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A가 무엇이든 A는 A와 같아야 합니다. A의 자리에 ‘있다’와 ‘없다’가 들어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다’는 ‘있다’이고 ‘없다’는 ‘없다’입니다. 결국 있다만 있고 없다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라고 시작하는 물음은 그 전제 자체가 자기모순적이므로, 성립불가능한 물음이라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식으로 있음을 절대화하고 무를 절대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존재를 허무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물음이 남습니다. ‘있다’는 있다이다. 그리고 ‘없다’는 없다이다.―이 말에서 성립하는 동일성은 그 자체로서는 말의 동일성이고 생각의 동일성입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말과 생각의 자기동일성을 존재의 자기동일성으로 치환합니다. ‘있다는 있다이다’를 그냥 ‘있다는 있다’ 또는 ‘있는 것은 있다’라고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다는 있다가 아니다’라거나 ‘있다는 없다이다’라고 말한다면, 생각의 자기동일성을 어기는 것이므로, 그런 말이나 생각이 불가능한 것처럼 ‘있음은 있지 않다’거나, ‘있는 것은 있지 않다’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A는 A이다’라는 생각의 자기동일성을 ‘있음은 있다’ 또는 ‘있는 것은 있다’라는 존재의 자기동일성으로 치환한 다음, 생각의 자기동일성을 어기면 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존재의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면 우리가 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있음은 언제나 있음일 수밖에 없고 없음은 그냥 절대적인 없음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의 동일성을 존재의 동일성과 동일시하는 것이 옳습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논리학의 동일률은 생각의 동일성을 표시하는 법칙이지, 존재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법칙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말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개는 개지만, 사람도 개도 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념의 자기동일성이 그 개념이 표현하는 대상의 존재를 정립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정은 ‘있다’는 개념이나 ‘없다’는 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다’와 ‘없다’가 생각이나 개념인 한에서, ‘있다는 있다’이고 ‘없다는 없다이다’라고 우리는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한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옳습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있다는 있다이다’라는 생각의 자기동일성을 ‘있다는 있다’라는 존재의 자기동일성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역시 ‘없다는 없다이다’라는 생각의 자기동일성을 ‘없다는 없다’라는 현실적 진술로 바꾸어 버립니다. 생각의 자기동일성을 표현하는 문장의 술어는 ‘이다’입니다. 이 술어는 언제나 ‘S는 P이다’의 형태로 쓰여 하나의 사태 S와 다른 사태 P의 동일성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동일성 가운데 최고의 동일성은 ‘S는 S이다’라고 표현되는 자기동일성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동일성은 말이나 개념의 자기동일성 또는 생각의 자기동일성입니다. 이런 자기동일성을 어길 때 모순에 빠지고 파괴되는 것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의 자기동일성을 어기면 안 됩니다. 이런 사정은 ‘있다는 있다이다’라고 말하거나 ‘존재는 존재이다’라고 말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다’는 ‘있다’가 아니다라고 말하거나 ‘없다’는 ‘없다’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의 자기동일성을 어기는 것이므로 모순되고 불가능한 진술인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해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라거나 ‘무는 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다 그런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있다는 있다’는 진술의 동사는 ‘이다’가 아니라 ‘있다’입니다. 있음이 있다거나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은 그런 논리적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존재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진술입니다. 그것은 있음이 계속 있음이지 없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있음이라는 개념이 없음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있음이라는 개념이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있다는 현실이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있음이 있다’는 말은 ‘있는 것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사정은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없는 것이나 없음의 개념이 아니라 ‘어떤 것이 없다’ 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은 개념의 논리적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있음이라는 현실의 절대적 정립 그리고 없음이라는 사실의 절대적 부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존재의 동일성이 과연 생각의 자기동일성처럼 타당한 것일까요? A=A가 생각의 자기동일성인 한에서, A가 non A일 수는 없지만, ‘있다’와 ‘없다’가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일 경우에는, 모든 것이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고, ‘없다’가도 생겨날 수 있지 않나요?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면,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도 있다가 없어질 수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이 없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있다는 있고, 없다는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이내 모든 것은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으니, 이 세상도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하고, 다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미끄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또다시 허무의 심연으로 미끄러지는 까닭은 생각의 동일성과 존재 그 자체의 동일성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있다’가 있고, ‘없다’가 없다는 말이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말과 생각의 진리일 뿐, 현실에서는 온갖 것이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있다가 있고 없다가 없다는 것은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의 동일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옳지만, 그런 생각이 실제로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까지 담보해줄 수 있는지 아닌지는, 우리로서는 단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하는 인간. 사진 픽사베이
생각하는 인간. 사진 픽사베이

2.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는 말에 대하여

앞의 강의에서 이미 소개한 단편에서 파르메니데스가 “생각함도 있음도 같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단편, B3]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바로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한다’는 것과 ‘있다’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있다’는 있다이고, ‘없다’는 없다이다는 생각의 동일성을, 있음은 있고 없음은 없다거나,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존재의 동일성으로 확장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있다는 사실이 동시에 생각한다는 사실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생각의 가장 근원적인 진리인 자기동일성의 원리를 존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모든 면에서 절대로 없을 것이므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는 물음도 자연히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무를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함과 있음이 정말로 같은 것입니까? 같다면 어떤 의미에서 같은 것입니까? 그리고 여기서 생각함이나 있음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앞서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을 소개할 때, 우리는 이 단편이 생각과 있음의 근원적 동일성을 표현하는 것인데, 생각과 있음의 동일성은 “우리가 존재를 그 자체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을 통해 존재의 진리를 묻고 탐구할 수 있는 까닭은 있음이 생각과 근원적으로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의 강의에서 우리는 이처럼 생각과 있음의 근원적 동일성이 그 자체로서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묻지 못했던 것을 이제 우리는 여기서 물어보려 합니다.

생각함과 있음은 같은 것이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후세에 전해준 사람은 서기 3세기의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인데, 그는 그냥 이 말을 후세에 전해준 것이 아니고, 이 말의 의미를 스스로 천착하여 있음과 생각함의 동일성의 사상을 자기 방식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가 이 말을 소개한 『엔네아데스』(Enneades)의 5권 1장 8절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전에 파르메니데스도 ‘생각함과 있음은 같은 것이다’라는 말을 통해, 존재[자]와 정신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면서, 이런 견해를 제시했거니와, 그는 존재자를 감각적 대상들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생각함을 [존재자에] 부여하면서도, 그것이 부동적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그것으로부터 모든 물체적 운동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이 언제나 한결같이 머무르는 결과가 되었다. 또한 그는 [존재를] 구형의 덩어리에 비유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것이 모든 것을 [자기 속에] 포괄하고 있고, 생각 역시 [존재의] 외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존재가] 하나라고 말함으로써 비판을 자초했는데, 그 까닭은 이 하나가 여럿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 조규홍 옮김, 『영혼, 정신, 하나』, 62쪽]

여기서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이런 견해”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플로티노스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선구로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데아는 일종의 정신적 실체입니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삼각형의 순수한 개념이 우리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면, 그렇게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삼각형의 개념이 삼각형의 이데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순수한 개념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오직 생각할 수 있는 관념적 대상인데, 그런 정신적 대상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니까, 이데아는 생각과 있음이 그 자체로서 하나로 결합된 어떤 정신적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존재[자]가 그 자체로서 정신적이라는 것, 또는 존재와 사유가 근원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존재의 정신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위의 인용문에서 존재의 정신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서 플라톤의 이데아를 소개한 뒤에, 그것의 선구로서 “생각함과 있음은 같은 것이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문맥을 고려하여, 과연 생각과 있음이 같다는 것 또는 존재가 정신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차분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플로티노스의 말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봅시다. 그는 “생각함과 있음은 같은 것이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소개하면서, 이 말을 두고 “존재자(τὸ ὄν)와 정신을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함과 있음은 같은 것이다’는 말을 플로티노스는 ‘존재자와 정신이 같은 것이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존재자와 정신이 같다는 말일까요? 우리가 이렇게 물으면, 플로티노스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 까닭은 존재자가 감각적 대상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플로티노스는 파르메니데스가 생각함(to noein/to think)을 존재자에 부여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존재자가 생각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생각함이라는 동사 행위를 존재자에 부여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앞에서 플로티노스가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가리켜 존재자와 정신을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정신이란 생각의 주체니까, 존재자가 정신과 같다는 말은, 존재자가 생각한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신이 하는 일이 생각하는 것이니까, 존재자가 정신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생각하는 주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지만 돌멩이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존재자가 생각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처럼 들립니다. 그런 말은 모든 사물을 무차별하게 생각의 주체로 삼는 것이므로 상식에 반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어려운 대로 남겨두고 일단 플로티노스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자면, 파르메니데스는 “생각함을 [존재에] 부여하면서도, 그것이 부동적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부동적(不動的)이라는 말은 움직임이 없다는 말이니까 변화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습니다. 있음은 있음이고, 있음이 없음일 수는 없으니, 우리는 존재가 자기동일적인 것으로서 부동적이고 불변적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있음이 또한 생각함과 같은 것이라면, 또는 생각이 있음과 같은 것으로서 있음에 속한다면,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 부동적인 것일까요? 우리의 모든 생각은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이고, 그런 한에서 대상이 변함에 따라 우리의 생각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있음과 생각함이 같다고 말할 때, 그 생각이 대상에 대한 생각이라면, 생각은 부동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생각이 부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생각이 부동적이려면, 생각의 대상이 언제나 동일하고 불변적인 대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이 그런 것일 수 있을까요? 여기서 플로티노스는 이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이 생각 자신을 생각할 때,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만이 부동적이고 불변적인 생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아리스토텔레스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칸트 역시 대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만화경처럼 변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자기의식은 언제나 동일하고 불변적인 생각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여기서 자기의식이란 ‘나는 남자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광주에 산다’와 같은 종류의 자기에 대한 생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기인식은 구체적인 내용이 있으므로 그 내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자기의식이란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입니다. 이런 자기의식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의 생각’이라고 불렀고 칸트는 자각(自覺/ap-perception)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어떻든 이런 자기의식은 아무 내용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고 또 같은 한 사람의 생각 속에서도 시간을 초월해 동일하게 지속하는 자기의식입니다. 우리가 변치 않는 생각을 말할 수 있다면 유일하게 그런 순수한 자기의식이 부동적인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파르메니데스와 플로티노스가 말한 생각함의 부동성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도 좋다면, 일단 여기서 있음과 동일시되어 있는 생각함이란 자기 아닌 다른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런 생각이며, 또한 그런 까닭에 이런저런 대상에 의해 변화되거나 바뀌지 않으므로, 불변적이고 부동적인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생각함과 있음이 한편에서는 자기동일적이고 부동적인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있음은 또한 자기 거리 속에 있음인데, 그렇게 있음이 자기 자신과의 거리 속에 있는 까닭은, 있음이 생각과 같고, 그 생각은 다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란 자기를 대상으로 삼는 생각이므로 생각하는 주체인 자기와 생각되는 대상인 자기가 같은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주체와 대상으로 거리 속에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란 한편에서는 남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생각이므로 ‘나는 나다’라는 자기동일성의 의식이지만, 자기를 대상으로 의식한다는 점에서 자기거리의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의식 속에서 자기동일성과 자기부정성이 공속하는 것입니다.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면, 있음은 생각의 이런 자기동일성과 자기부정성을 그대로 떠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있음의 불변적이고 부동적인 자기동일성도, 그리고 있음의 자기거리도 모두 있음이 생각이기 때문에 생각의 자기동일성과 자기거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더 전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경청하는 시간인데, 그들이 이것을 방금 제가 설명한 방식으로 친절하게 설명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플로티노스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자기 속에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어떤 무한한 공[球]과도 같은 것으로 표상했으며, 생각 역시 그 공의 외부가 아니라 그 공과도 같은 존재 내에 속한다면서, 생각과 존재가 다른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파르메니데스가 그런 존재가 유일한 하나라고 주장했으나, 이 견해는 사람들의 비판에 부딪혔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하나만이 아니라, 여럿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지금까지 우리는 플로티노스가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만, 이런 말들은 한 번 들어서는 그 뜻을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찬찬히 그 말을 복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순서를 거꾸로 하여 마지막 말부터 다시 봅시다. 플로티노스는 파르메니데스가 “자신의 책에서 [존재가] 하나라고 말함으로써 비판을 자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존재자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비판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려 한 것을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기된 비판이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가 하나라고 말한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강의에서도 말했듯이 있는 것들이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있음은 똑같습니다.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다 할 때, 해와 달과 별은 다른 것들이지만 그것들의 있음은 똑같은 하나의 있음인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자]가 여럿이 아니고 하나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였을 것입니다.

존재[자]를 공에 비유했다는 말도 우리는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존재가 아무런 차별도 없는 하나의 무한하고도 일양한 공과 같다는 것은 존재가 마치 뉴턴이 생각한 절대 공간처럼 어디서나 동질적인 지평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 지평 속에서 모든 사물은 존재하겠지요. 그런데 공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형태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동질적이고 일양한 3차원의 물체로서 존재하듯이, 이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삼라만상이 있음의 관점에서는 동일하고 일양한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상하여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자]가 무한한 공과 같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파르메니데스의 말 가운데 사람들의 비판을 자초했다는 말에 대해서는 도리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존재가 하나라는 말도, 공과도 같은 덩어리라는 말도, 더 나아가 부동적이라는 말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런 말이 아니고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다”는 말과 그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설명입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존재는 세 가지 의미에서 정신적입니다. 첫째로 생각함과 있음이 같다고 말한다면, 있음이란 사태가 생각함이란 활동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있음은 생각함이라는 동사행위와 같은 것으로 파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함은 반드시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의 대상을 전제합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생각함이란 일어날 수 없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생각은 아무 내용도 없는 무사유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함이란 반드시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되는 대상이라는 두 계기로 나뉘기 마련입니다. 있음이 생각함과 같은 것이라면, 있음 역시 생각의 그런 계기들을 자기 속에 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있음이 생각과 같다면 그것은 한편에서 어떤 생각되는 대상으로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을 플로티노스는 “존재자가 감각적 대상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있음이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음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있음을 마음의 눈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존재는 정신적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또한 생각하는 자, 즉 생각의 주체를 전제합니다. 그래서 있음이 생각함과 같은 것이라면, 있음은 또한 생각하는 자와도 같을 것입니다. 존재의 정신성을 이런 식으로 파악하여 플로티노스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자와 정신을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있음은 세 가지 의미에서 생각함과 같습니다. 첫째로 동사행위 그 자체로서, 또는 사건 그 자체로서 있음과 생각함은 같은 것입니다. ‘있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떤 것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의 있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오직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있음은 정신의 대상이고 정신적 사건입니다. 마지막으로 있음은 언제나 어떤 것의 있음이므로 있음은 반드시 있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런 사정은 생각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함은 언제나 생각하는 자를 전제하는 것이지요. 생각하는 자를 우리는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생각함과 있음이 같다면,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있는 자는 생각하는 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자가 다름 아닌 정신이라면, 우리는 존재자가 곧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있음은 활동 그 자체로서는 생각함과 같고, 대상으로서는 감각이 아니라 정신적 대상이라는 점에서 오직 생각되는 것이며, 있음이라는 사건의 주체로서는 생각하는 자인 정신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있음은 생각함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생각의 활동과 있음의 활동이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생각하는 자로서 정신과 같은 것일 수도 있으며, 생각되는 것으로서 정신적 대상 또는 정신적 사실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존재를 생각의 세 가지 계기에 따라 역시 세 가지로 구분해서 고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알기 쉬운 것은 존재자가 생각의 대상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특별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있고, 꽃이 있고, 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꽃이 아님을 압니다. 그리고 꽃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땅이 아님을 압니다. 그리고 땅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하늘이 아님을 압니다. 사람도 있고, 꽃도 있고, 땅도 있고, 하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과 꽃과 땅과 하늘이 ‘있다’는 것을 어떤 모습을 보고 아는 것입니까? 그것들의 모습은 모두 다른데, 있음은 모두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 같은 것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이것은 사람이고 저것은 꽃이라는 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모습을 우리는 눈으로 보아서 압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꽃과 땅과 하늘이 모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모습이 과연 어떤 것입니까? 있음이라는 동일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동일한 모습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과 꽃과 땅과 하늘이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공간적 연장(extention)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물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는 공간 중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추상적 존재들은 공간 속에 펼쳐진 사물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도 존재합니다. 즉 있습니다. 그러니까 있다는 사실은 공간적 펼침을 통해 식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있음이 나 여기 있다고 우리에게 소리로 알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있음은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지만, 맛도 없고, 냄새도 없습니다. 당연히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자는 감각적 대상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라고 플로티노스는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꽃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니, 오직 마음의 눈으로 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꽃이 있다는 것은 오직 생각 속에서만 알려집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있음과 생각함이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있다는 사실이 오직 생각 속에서만 열리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존재의 정신성을 이루는 세 가지 계기들 가운데 두 가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있음은 생각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정신적입니다. 둘째로 있음이 생각함 속에서 비로소 열린다는 점에서, 있음이라는 사건은 생각함이라는 활동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물음이 생깁니다. 오직 생각 속에서 있음이 열린다는 의미에서 생각함과 있음이 같다면, 생각하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까? 이런 물음이 주어질 것을 내다보고 저는 앞에서 있음이 생각 속에서 열린다고 말했더랬습니다. 이것은 생각이 있음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있음을 개방한다, 즉 알려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내 앞에 핀 한 송이 꽃을, 생각을 통해 있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은 존재에 대해 무력합니다. 내가 생각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꽃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꽃이 만발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그 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꿀을 찾아 꽃에 내려앉는 나비는 어떤 것이 꽃이고 어떤 것이 꽃이 아닌지를 너무도 잘 알 것입니다. 하지만 나비는 꽃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나비의 세계는 있음 이전의 사물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은 나비이고 저것은 꽃이라는 것도 알지만, 나비와 꽃이 모두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세계는 있음의 지평 속에서 열리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있음의 지평은 오직 생각 속에서 열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있음은 정신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식으로만 존재의 정신성을 설명하게 되면,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있고 없는 것이 이렇게 한갓 앎의 문제로 치환되어도 좋은 것입니까? 우리가 있음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지 간에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형이상학이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존재가 어떻게 알려지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서 무엇인가 있다는 것의 의미와 근거 아닙니까?

만약 파르메니데스가 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던 생각함이 단지 있음을 알아차린다는 의미에서 있음과 같은 것이라면, 그런 생각함은 엄밀한 의미에서 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생각함이 정말로 있음과 같은 것이라면, 생각함이 어떤 것을 있게 만드는 근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 내가 어떤 것을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있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생각함이 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각함이 있음을 드러나게 한다는 이유로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과장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함으로써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든 생각은 생각이고 존재는 존재입니다. 배고픈 노숙자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더라도, 사람은 그 생각을 통해 단 밥알 한 톨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생각함이 있음 그 자체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의 경우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있음과 같은 것인 그 생각함이,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신의 생각일 경우입니다. 신이라는 이름이 너무 서양적, 기독교적으로 들린다면, 같은 것을 원효(元曉)처럼 일심(一心)이라고 불러도 상관없겠습니다. 이름을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삼라만상이 어떤 절대적 정신의 생각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이 경우 우리는 아주 정당하게,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함으로써 먼지 하나도 있게 만들지 못하지만, 신은 ‘빛이 있으라’라고 말할 때, 빛은 그 말을 통해 있게 됩니다. 신의 말 또는 신의 생각은 사물 그 자체의 있음과 같습니다.

이런 사정은 인간적 생각의 경우에도 유사한 데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머릿속에서 생각할 때, 그 대상은 한갓 관념으로 내 마음 속에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한 송이 장미꽃을 생각한다면, 내가 그 장미꽃을 계속 생각하고 있는 한에서, 그 꽃은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심상으로서 내 머릿속에 떠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 꽃을 생각하기를 멈추면, 그 심상은 마치 비눗방울이 터지듯이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신의 무한한 정신과 피조물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이 빛이 있으라고 말할 때, 빛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신이 그 무한한 정신 속에서 생각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약 신이 우리 가운데 누군가를 살뜰하게 생각하는 일을 멈춘다면, 마치 우리가 장미꽃을 생각하다가 멈출 때, 그 꽃의 심상이 내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리듯, 우리 역시 존재하기를 멈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는 신의 생각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생각이 한갓 인간적 표상 능력이 아니고 절대적 정신의 무한한 창조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너무도 정당하게 생각함이 있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적 정신이 오직 생각함으로써 만물을 창조한다면, 신의 생각은 당연히 만물의 있음 그 자체가 되겠지요. 그리고 생각함과 있음이 같다는 말은 있음이 결국 생각하는 정신에 근거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이런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은 아무래도 그리스도교의 성립과 함께 일어난 일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저 유명한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이라고 번역한 낱말은 “로고스”(logos)인데, 이 말은 원래 ‘말한다’는 뜻의 동사 ‘레게인’(legein)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로고스는 원래 말하는 행위를 명사적으로 표현하는 낱말로서, 말하는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는 낱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을 하는 행위에는 당연히 말하는 자와 말해지는 내용이 전제되어 있겠지요. 그래서 로고스는 말을 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주체로서 이성을 뜻하기도 하고 또 말의 내용이 되는 낱낱의 낱말을 뜻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첫 구절은 밑도 끝도 없이 허공에 낱말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것이 생겨나기 전에 생각하는 정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로고스라는 말은 또한 근거의 의미도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이성을 의미하는 reason이라는 낱말이 근거를 의미하기도 하듯이, 로고스라는 낱말도 근거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말은 태초에 정신이 만물의 근거로서 먼저 있었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제1장은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여기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은 말씀, 즉 로고스가 생각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생각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만물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말은 로고스가 만물의 존재 근거라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로고스는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신적인 정신, 아니 하나님 자신입니다. 신은 생각하는 정신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는 한에서, 자기 자신이 바로 존재 그 자체이면서 다른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존재의 정신성이란 마지막으로 있음이 생각하는 정신과 같다는 뜻이 되겠지요.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정신이나 그런 정신이 생각하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우리는 표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장미꽃을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사례에 비추어 신적 정신이 어떻게 생각을 통해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지를 희미하게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임마누엘 칸트의 동상. 사진 픽사베이
임마누엘 칸트의 동상. 사진 픽사베이

칸트는 이처럼 생각을 통해 사물을 직접 존재하게 하는 그런 신의 사유 능력을 가리켜, 지성적 직관(intellectual intui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칸트의 용어법으로는 직관이란 쉽게 말해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경우 어떤 대상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는 자의 외부에서 대상이 먼저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수동적인 수용의 능력입니다. 이에 반해 생각하는 능력은 자발적인 능력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아무 대상이 없는 경우에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정말로 우리가 아무것도 보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감각하는 것이 없다면, 생각이 일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삼각형의 개념처럼 우리의 정신은 감각하지 못하는 것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어떤 의미로든 생각이 감각하지 못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능력은 그렇게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측면을 분명히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개별적인 대상을 그 개별적 구체성 속에서 직접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라, 언제나 개별적 사물을 보편적 개념을 통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나는 내가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내 앞에 없어도, 얼마든지 그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란 개별자를 직접 보듯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희미한 심상이나 관념으로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런 인간적 생각의 경우와 달리 신의 경우에는 생각하는 것이 보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신적 정신의 사유 활동을 지성적 직관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생각이 보는 것과 같고 보는 것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신이 보편적 개념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개별적인 존재자를 바로 그 개별성과 개체성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각함으로써 동시에 있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은 모든 사물을 눈으로 보듯이 생각하고, 생각 속에서 봅니다. 다시 말해 신은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사후적으로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이 스스로 존재하기 전에,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자신이 창조할 사물을 하나하나 생생하게 보듯이 생각함으로써 만물을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생각함이 있음과 같다는 것은, 이처럼 신적 정신이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 곧 그것을 있게 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4. 정신과 하나 사이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고전적 형이상학에서 있음이 어떤 의미에서 정신적인지 또는 생각함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있음은 오직 생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과 같습니다. 그리고 있음은 생각함 속에서만 열린다는 점에서, 있음과 생각함은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있는 것은 절대적 정신의 자유로운 생각에 의해 있게 된다는 점에서 있음은 생각함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있음이 생각과 같다고 말할 때, 생각은 인간의 생각이기도 하지만 신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가운데서 누구의 생각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신의 생각이야말로 고유하고도 본래적인 의미에서 있음과 같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은 그 자체로서 있음과 같은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있음을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또는 알아차린다는 의미에서 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생각은 어떤 사물도 있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생각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직 인식론적인 의미에서 있음과 같습니다. 있음은 언제나 생각되어 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있음은 정신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음은 그 자체로서 생각과 같은 것이 아니고 생각에게 주어진다는 점에서만 있음과 같습니다.

있음이 그 자체로서 생각과 같은 것은 오직 신의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고전적 형이상학의 관점에 따르면 신은 그 자체로서 필연적으로 있는 자인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을 자기 생각에 따라 있게 만드는 근원이기도 합니다. 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 원인(causa sui)이며,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 존재의 원인입니다. 그런데 신은 그 모든 것을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생각함으로써, 있게 합니다. 또는 신은 생각하는 존재 곧 정신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신의 정신, 신의 생각은 무한하고 절대적입니다. 그리하여 신 속에서 생각과 있음이 하나로 합일합니다. 신에게서 있음과 생각함은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완벽히 같은 하나입니다. 그리하여 신의 있음이 절대적이듯이 신의 생각도 절대적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에게서 생각함과 있음은 같은 것입니다. 당연히 생각의 원리와 있음의 원리도 같은 것이겠지요. 결과적으로 생각의 자기동일성의 원리는 있음의 자기동일성의 원리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생각함과 있음의 동일성이 신에게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생각의 자기동일성과 있음의 자기동일성에 근거하여, 있는 것은 언제나 있고, 없는 것은 절대로 없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없다는 사태는 절대로 없다는 것도 그럴 만하다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절대적 허무는 잊어버리고 언제나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에게만 몰입해도 되는 것입니까?

어쩌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후세에 전해준 플로티노스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플로티노스는 한편에서는 생각함과 있음의 동일성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절대자는 정신적 존재가 아니고, 정신이나 생각 너머의 ‘하나’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에 의해 존재자로서 존재한다. 이런 사정은 으뜸가는 의미에서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것들은 물론이고, 어떤 의미로든지 간에 존재자들 가운데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것이 하나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존재자들이 하나를 잃어버린다면, 그것들은 더는 자기들이 이름 불리는 바로 그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군대가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합창단과 가축의 무리 역시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집이나 선박 역시 그들의 하나됨을 잃어버린다면 존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집도 하나이고 선박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것들이 그 하나를 잃어버린다면, 집도 집이 아닐 것이며, 선박도 선박이 아닐 것이다.” [엔네아데스, 6권 9장 1절]

여기서 플로티노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에 의해 존재자로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근거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은 하나인 한에서 있기 때문입니다. 군대가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면, 다수의 사람들이 있을 뿐, 군대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군대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를 이룰 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은 집이나 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이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러저런 건축자재의 덩어리일 뿐 집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다른 모든 존재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존재자는 여러 부분들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한에서만 그것이 이름 불리는 바로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한에서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해주는 근거는 그 존재자들에 깃들인 ‘하나’입니다.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만물의 절대적 근거인 ‘하나’를 숫자 하나와 구별하기 위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그런데 플로티노스가 이처럼 존재 일반의 절대적 근거를 하나-님이라고 본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의 유산입니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를 세계의 존재론적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이데아’란 이 낱말의 어원을 생각하면 원래 사물의 모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형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이 형상은 눈에 보이는 사물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정신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 사물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삼각형에 대해서는 삼각형의 이데아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람의 이데아, 말하자면 사람의 본성이 있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삼각형들은 삼각형의 이데아에 의해 생겨나고, 개별적인 사람은 사람의 이데아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이 플라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이 생각한 이데아는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존재자들을 만들어 낸 일종의 형식적 패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통속적인 비유이지만, 이데아는 붕어빵을 찍어내는 빵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빵틀에서 찍혀나오는 붕어빵들도 여럿이지만, 빵틀 자체도 하나가 아닌 것처럼, 플라톤의 이데아들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삼각형의 이데아와 사람의 이데아는 다른 이데아일 테니까요. 그래서 세계 내에 무수히 많은 사물들과 존재자들이 있듯이 그것들의 이데아도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여러 이데아들을 두고 존재 일반의 절대적 근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그런 절대자를 신이라고 부른다면, 이데아가 신은 아닐 것입니다. 신은 이데아를 넘어선 곳에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데아들 저편에 이데아들이 근거하고 있는 절대자인 신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플라톤의 후기 사상은 이 물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플라톤이 『국가』 제6권에서 이데아들의 이데아, 즉 모든 이데아들을 근거짓는 최고의 이데아를 ‘좋음’, 또는 좋음의 이데아라고 제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자신이 제시한 이 대답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비슷한 시기에 쓴 『향연』에서는, 아름다움이 최고의 이데아로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대의 여러 전승과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 보면, 플라톤은 이런 모색 끝에 일종의 피타고라스적 수-존재론 또는 수-이데아론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따르면 이데아는 수와 같습니다. 각각의 수가 각각의 이데아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수는 결국 ‘하나’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하나’가 만물의 절대적 근거라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세계가 수라는 이데아와 모든 수의 근원인 ‘하나’라는 최종 근거로부터 근거 지어져 있다는 생각은 이 세계가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생각에 비해 도리어 더 현대적인 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믿음이 무언가 너무 종교적 세계관처럼 보이는 데 반해, 세계가 수학적으로 질서지어져 있다는 생각은 훨씬 더 합리적인 세계관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오가 자연은 신이 수라는 글자로 쓴 책이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 또는 수적 비례가 자연의 근본 형식이고, 그 모든 수 가운데서도 ‘하나’가 모든 수적 비례와 수학적 연산의 으뜸가는 원리라는 것은 특히 데카르트 이래 과학과 수학이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는 통찰입니다. 그러니까 이데아가 사물의 본질적 형상이라는 말 대신, 자연이 수와 하나라는 본질적 형상에 의해 근원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오늘날의 과학자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존재가 정신적이라는 것 역시 과학의 관점에서도 굳이 거부할 까닭이 없겠지요. 왜냐하면 누구도 하나와 여러 수들을 물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이 수라는 글자로 쓰인 책이라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수라는 정신적 원리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물의 존재가 정신적이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생각의 피안에 있는 절대자

그러나 여기서 플라톤의 하나 그리고 수-존재론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플라톤 자신에게서 ‘하나’가 존재의 절대적 근거라는 생각은 명확하게 제시되지도 않았고, 체계적으로 전개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암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이 암시했던 ‘하나’의 형이상학을 보다 명확하고도 철저히 전개시켜 자기 나름의 철학 체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하나’의 존재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신의 피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정신이 다수로 존재하기에, 그것이 정신이라고 하고, 생각함 자체도 불현 듯 떠오르는 것으로서, 아무리 그것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다수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전적으로 단순한 것이자 모든 것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것은 정신 너머에 존재해야 할 것이다.” [엔네아데스, 5권 3장 11절]

알쏭달쏭한 이 구절의 뜻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정신은 다수로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순수한 하나가 아니므로, 하나-님은 정신의 피안 그리고 생각의 피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은 언제나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생각 속에서 주체와 대상이 서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정신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외부의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정신입니다. 내가 나를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 정신이 수행하는 사고 작용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정신을 가리켜 위의 인용문에서 “불현듯 떠오른 것으로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부 대상을 생각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 불현듯 떠오르듯이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이 외부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주체라고 하더라도, 생각하는 자기와 생각되는 자기가 구별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정신은 순수한 하나가 아니고, “다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자 하나-님은 여럿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단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신일 수 없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정신 너머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절대자 또는 신이 생각하는 정신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되는 객체로서 둘로 쪼개진 존재일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자가 둘로 쪼개져 있다면, 그 둘 사이에 어떤 쪽이 더 먼저인지가 분명히 문제 될 것이고, 이 경우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되는 대상이 모두 일방적인 우위를 주장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자는 생각되는 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고 생각되는 대상 역시 생각하는 주체가 없다면 생각될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생각하는 주체도 생각되는 대상도, 모두 서로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으니, 어느 쪽도 온전히 스스로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의 주체도 대상도 참된 절대자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 절대자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은 생각이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플로티노스는 보았습니다. 정신이 생각하는 대상이 아무리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생각 속에서 정신은 주체와 대상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고, 이런 분열은 정신이라는 존재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의 징표라고 플로티노스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분열이 존재의 불완전성의 징표라면, 하나-됨은 존재의 진리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오직 하나를 이루는 한에서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플로티노스는 존재의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에서든, 모든 존재 일반의 근거라는 의미에서든 절대자는 순수하고도 절대적인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가 절대자가 정신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절대자가 물질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절대자는 정신보다 더 저급한 존재인 물질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정신보다 더 높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정신을 초월해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정신이 그 근원적인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만물의 근거이듯이 정신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런 한에서 그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속에 정신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 자체는 정신보다 더 높은 것이며, 단지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다 포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만물이 그로부터 생겨나온 최고의 절대자를 신이라고 부른다면, 그 신은 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신이 정신이라고 철학자들이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의 정신에 비추어 신을 최소한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로 표상할 수 있지만, 신이 정신을 넘어선 하나라고 말할 때는,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도 표상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플로티노스 역시 이 점을 부인하지 않았으니, 그는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신을 그 자체로서 규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다만 신이 물질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다라고 부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신이 하나-님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이 하나일 경우에만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신이 최고의 존재근거로서 하나 그 자체라는 말일 뿐, 정작 그 하나-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는 바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에 대해 신은 이것이 아니다, 저것이 아니다라고 부정적으로 말할 수는 있지만, 신을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플로티노스의 철학 체계를 가리켜 후세의 학자들은 부정 신학(negative theology)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6. 존재의 피안에 있는 절대자

그런데 플로티노스 정신이 아니라 하나-님 최고의 존재근거로 삼았다는 점 이외에도 또 다른 한 가지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통찰을 후세에 유산으로 남겼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생각의 피안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피안이기도 하다는 통찰입니다. 그 까닭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생각함과 있음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으뜸가는 의미의 실체는 있음의 그림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있음을 충만한 것으로 소유해야만 한다. 그런데 있음은 생각함과 삶의 형상을 가지고 있을 때 충만하다. 그러므로 존재자에게는 생각함과 삶과 있음이 공속한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이 존재자라면, 그것은 또한 정신이며, 그것이 정신이라면, 그것은 또한 존재자이다. 그리고 생각함은 있음과 공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함은 여럿이지 하나가 아니다. 따라서 이 같은 부류에 들지 않는 것에는 생각하는 일도 없다는 것이 필연적 귀결이다.” [『영혼, 정신, 하나』, 80쪽]

있다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한갓 그림자와 같은 것이 아니려면, 있음의 내실이 충만하게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있음의 내실은 “생각함과 삶의 형상”입니다. “삶의 형상”이란 존재자가 지닌 힘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자면 ‘뒤나미스’(dynamis), 즉 어떤 능력을 발휘할 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을 플로티노스는 “삶의 형상”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쉽게 말해 삶의 형상이란 삶의 원리인 생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모든 존재자는 물질조차 활력을 지니고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삶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은 그렇다고 하지만, 있음이 어떤 의미에서 “생각함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요? 이 말은 쉽게 말해 있음이란 생각에 속한 모든 본질적 요소들 즉 생각할 수 있고 생각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앞에서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는 말을 설명할 때, 우리가 살펴보았던 생각의 세 가지 계기들이 모두 있음에 속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있음이 이처럼 생각함과 삶의 형상을 통해 충만한 있음, 온전한 있음이 되는 한에서, 있음은 언제나 생각함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함은 있음과 공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함의 계기들은 아무리 단순화시키더라도 생각의 활동, 생각의 주체, 생각의 대상으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각함의 형상이란 결코 순수한 하나일 수 없으며 언제나 여럿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부류에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 그대로 하나이지 여럿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런 절대자인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생각의 피안인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면, 생각함의 피안은 있음의 피안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플로티노스는 “존재 너머에 있는 것은 또한 생각함 너머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같은 책, 81쪽] 그러니까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므로 생각의 외부는 있음의 외부이며 있음의 외부는 동시에 생각의 외부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로서 생각 너머의 절대자이며, 또한 있음을 초월한 절대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 존재자가] 참여하고 있으며 각 존재자를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존재하도록 하는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만약 그것이 각 존재자를 존재하도록 만들어주고, 더 나아가 저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그것[=정신] 자신도 존재하게 되고, 그것의 온갖 존재자들이 자족적인 존재자가 된다면, 그것[=하나-님]은 존재와 자족성의 산출자임이 분명하며, 이때 그것 자체는 더이상 실체가 아니고, 그것의 피안이자 또한 자족성의 피안임이 분명하다.” [같은 책, 125쪽]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은 형이상학의 궁극적 탐구 대상인 존재의 절대적 근거입니다. 그런데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를 이룸으로써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만물의 존재 근거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의 존재 근거라면, 그 하나-님 자신은 존재를 초월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원래 “존재의 피안”이라는 말은 플라톤이 『국가』 제6권에서 좋음의 이데아를 가리켜 처음 했던 말입니다. 존재 일반의 절대적 근거는 존재의 피안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의 피안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절대적 근거가 존재의 피안이라는 것은 플로티노스가 이것을 다시 말하기 전까지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플로티노스는 절대자의 자리에 좋음 대신 ‘하나’를 놓은 뒤에 그 하나-님이 존재의 피안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존재의 절대적 근거가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는 생각을 부활시켰습니다.

생각하면 ‘존재의 피안’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명백한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절대적 하나는 있음의 피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있음의 피안에 있다는 말 자체가 모순적인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있음의 피안이라면 있지 않을 것일 터인데,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다시 [있음의 피안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듯이 어떤 것도 있음 외부에, 또는 있음을 넘어서, 즉 있음의 피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 모순입니다. 그리고 있음과 생각함이 떼려야 뗄 수 없이 공속하기 때문에 생기는 곤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있음의 지평 속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된 것은 어떤 식으로든 생각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이런 난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정신 또는 생각의 저편에 놓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있음의 저편에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는 그 자신 생각하는 정신도 아니고 이러저런 생각을 통해 규정될 수 있는 대상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생각과 있음의 근거는 생각과 있음의 그물에 갇히지 않는 절대적 초월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있음의 피안이라 해서, 우리는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는 있음의 근거이므로 자기 자신은 있음을 넘어서 있다는 말이므로, 그것이 있음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있음의 저편이듯이, 또한 없음의 저편입니다.

7. 다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또는 만물을 되비추는 무한한 거울에 대하여

이렇게 해서 플로티노스는 생각과 있음을 한꺼번에 어떤 한계 속에 묶어 두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통찰을 플로티노스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플로티노스는 생각도 있음도 절대적인 지평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각도, 있음도, 하나-님에 비하면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생각도 있음도 모두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어떤 한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없음이 있음과 언제나 쌍으로 나타난다면 있음과 함께 없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도 있음도 그리고 없음도, 비유하자면 모두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거울과도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있음과 없음 그리고 생각이라는 거울에 비친 우주의 모습을 봅니다. 모든 것은 생각 속에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속에서 나타나는 있음과 없음이 절대적인 지평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생각 속에서 이해하는 모든 있음과 없음이 사실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거울입니다. 플로티노스는 그 거울 너머의 절대자를 ‘하나-님’이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그 거울 저편이 어떤지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생각과 있음이라는 거울에 비친 사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있음과 없음과 생각이 통틀어 우리의 존재와 사유를 가두고 있는, 거울 같은 한계라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물음의 의미도 달라질 것입니다. 만약 있음과 없음과 생각이 거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무한히 열려 있는 절대적인 존재의 지평이라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있는가라는 물음도 절대적 의미를 지니겠지만, 만약 있음과 없음과 생각이 모두 우리를 가두고 있는 거울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거울을 향해 왜 없지 않고 있느냐고 묻는 물음은 그 물음의 무게가 훨씬 가벼울 것입니다. 아니 이 경우에는 그런 물음 자체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있음이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세계의 한계일 뿐, 그것이 무한한 전체의 지평이 아니라고 한다면, 전체의 근거를 묻는 물음은 더는 있음의 근거를 묻는 물음이 아니겠기 때문입니다. 무한하고 무제약적인 전체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있음의 피안까지를 포함한 전체의 근거에 대한 물음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있음의 피안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 수 없으므로, 결국 전체의 근거에 대한 물음 자체가 우리에겐 불가능한 물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체의 근거를 묻기 위해서는 먼저 전체를 상정해야 할 터인데, 우리는 생각과 있음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속에 있는 까닭에, 그 한계 너머의 참된 전체를 결코 표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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